2단우산
2단우산
Blog Article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는 어렵다. 정서와 관념이라는 추상의 세계를 함축적인 언어로 형상화하는 시는 때로는 뜬구름 잡는 말 같기도 하고, 뭔가 그럴 듯하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막연하기 그지 없다.
더구나 기법을 중시하는 현대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머리 아플 각오를 해야 한다. 대부분의 시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 속에서 이야기를 찾으려하기 때문이다. 시는 관념과 정서를 시어로 정제해 놓은 것인데 그 안에 사연을 찾으려하니 애당초 난망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노래를 들으며 공감하고 감동한다.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의 기본 정서가 드러나는 노래 가사는 그것을 듣는 청자의 삶 속에서 개별화된다.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과, 환희와 실망과 그리움과 애탐의 순간순간이 개별적인 사연 속에서 감동을 만들어낸다. 이야기가 노래를 듣는 이들의 삶으로 재창조되는 순간이다. 시의 모태가 노래이기에 시를 노래처럼 읽고 개별적 삶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감상한다면 좀 덜 어려워질 법도 하다.
지난 21일 서울 강서구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가 주최한 에세이 <이상한 나라에서 왔습니다>(2024년 12월 출간) 북토크에서 탈북민 오은정 작가(33)가 당차게 말했다. 그는 "바쁘다 보면 북과 고향을 가끔 잊기도 하지만, 설과 추석 등 명절이 다가오면 뿌리인 고향이 더 생각난다 "고 말했다.
탈북 전 북한에서의 삶과 이야기
에세이는 오씨가 탈북하기 전 고향 함경북도 경성에서의 추억과 생활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에세이를 내기 전에 2015년 시로 등단한 오씨의 시 <종자>는 '심을 것인가/먹을 것인가/봄이면 찾아오는 유혹' 3줄 시에 불과하지만 북한에서의 굶주림을 감성적으로 풀어 주목받았다.
2009년 탈북한 오 작가는 북한에서 중1 과정까지 다녔고, 글쓰기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숨겨진 재능과 가능성을 눈여겨본 박덕규 단국대 문예창작과 명예교수가 학교행사의 탈북민 코너에 오 시인을 초대하고 나중엔 글쓰기 첨삭지도까지 맡았다.
책은 47편 수필을 담았다. 북에서 겨울철 먹을 것이 없어 무를 도둑질하던 이야기부터, 힘겹게 탈북하는 여정까지 어린 소녀가 경험한 적나라한 삶이 쓰여있다.
가끔 탈북민 지인들로부터 최근 북한의 달라진 모습과 안부를 전해 듣는 그는 "북한도 예전과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에 하루빨리 자유가 오기를 소망했다.
오씨는 이른바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절 배급사회가 무너지면서 생긴 '장마당에서 자란 세대'로 이전 탈북민과는 다른 '열린 사고와 인식'을 가지고 있다. 남한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이들은 '먼저 온 통일'로 비유되기도 한다.
오씨는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계발하는데 멘토의 역할이 컸다며 박 교수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했다. 이를 보며 탈북민의 취업을 돕거나 자매결연을 맺는 개인과 기업의 역할이 새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 작가는 현재 북한 관련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삶과 체험을 알리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내심 그 젊음과 도전이 부러웠다. 실향민 2세인 나 또한 그의 활동을 응원하고 싶다.
이미 탈북작가들의 여러 스토리가 시중에 있지만, 이 책은 무엇보다 이데올로기나 인권 등 가치판단을 유보하면서도 북한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이는 화가들이 빗줄기 없이 우산과 무지개로도 비 오는 풍경을 그릴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의 애틋한 시선이 에세이에도 오롯이 녹아있다는 평가이다. 이날 북토크는 에세이 내용과 작가의 삶과 꿈 등 여러 주제를 다루었다.
저자 김영철은 파주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까지 그곳의 산과 강과 들을 걸으며 자랐다.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인사동과 계동 골목을 걸었고,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다니면서 대학로 혜화동 길을 걸었다.
교수로 첫 부임했던 해군사관학교에서 걸었던 진주의 바닷가와 벚꽃거리, 대구대 재직시절의 문천지 둑방길, 명예교수로 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던 건국대에서 일감호를 산책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상이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길 위에서 만들어 간 시적 여정이 사색으로 맺은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책 <시가 있는 산책>(2025년 4월 출간)은 시 평론집이 아니어서 어렵지 않다. 살아온 시간들을 반추하며 그때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시와 연결해서 소개하는 '시 에세이'라 할 수 있다. 그 시들은 한국문학의 걸작인 경우도 있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시인들의 작품에까지 망라되어 있다. 소개되는 시들은 동서양과 고전에 이르기까지 사뭇 방대하다. 더구나 작가의 삶과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로 순간순간 고개를 끄떡여가며 읽어가는 재미가 있다. 그 속에는 질곡의 한국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갔던 문인들의 낭만적 이야기가 가득하다.
1950년대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박인환의 시를 박인희가 1970년대에 불러 유명해졌던 <세월이 가면>이 그 당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선술집 '경상도집'에 모인 시인(박인환), 작곡가(이진섭), 가수(나애심)의 즉흥적인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처럼, 길에서 마주한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이 책의 곳곳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더구나 이 책에는 일평생 문학을 연구한 학자의 글답게 동서고금을 망라해서 철학자, 예술가, 문인들의 삶에 대해, 문학에 대해, 사물과 세계와 현상에 대해 언급한 경구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펜을 들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도 좋을 만하다.
산책하듯 읽는 시, 그 속에서 만나는 추억의 이야기
저자는 산과 강과 바다와 같은 자연을 기반으로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수많은 동식물들, 그리고 그 중 하나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함께 수많은 소재들을 추억처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그런 정서를 담은 시들을 소개한다. 산책하듯 시를 읽어가다 보면 독자의 삶 속에 수놓아진 개별적 추억들과 만나 또다른 이야기로 변주되어 나갈 것이다.
이 책은 몇 년 전 저자가 출간한 <한국가요사회사>(2021)와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일제강점기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근현대사의 가요들을 방대하게 소개하면서 작사가와 작곡가, 가수들의 삶을 그들이 살아갔던 시대와 연결하여 소개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익숙한 노래들을 흥얼거리듯 읽어나가면서, 한국사회를 살아갔던 이들이 마주했던 그 시대에 우리가 어떤 삶을 걸어왔는지, 어떤 질곡과 추억이 more info 있었는지 반추하게 한다. 이런 재미와 함께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수준 높은 안목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